들어가며

인간이라는 동물은 끝없는 호기심과 도전 정신 덕분에 늘 기이한 행동을 해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비행에 대한 집착이 그렇습니다. 참 신기한 동물입니다. 날개도 없으면서 왜 자꾸 하늘로 가려는 걸까요? 레드불이 날개를 달아준다고 하더라도, 원래 없던 걸 얻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죠.

그러나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도전 끝에, 인간은 결국 '중력' 이라는 감옥을 깨고 하늘을 날았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멈추지 않은 덕분에, 이제는 아예 '지구'라는 감옥을 벗어나 우주로 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여정에서 뺄래야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 기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상했겠지만, 당연히 VR(Virtual Reality) 기술입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인간이 우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VR이 어떻게 활약했으며, 현재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날지 않고 날 수 있을까?

비행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대단하지만, 하늘을 향한 도전에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위험이 따라붙습니다. 모든 동물이 그렇듯, 인간 또한 본능적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동물입니다. 호기심이나 도전 정신이 아무리 강해도, 공포라는 감정 역시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형성된 본능이죠.

“Curiosity killed the cat”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Curiosity didn’t kill the cat” 이라면 어떨까요? 인간이 호기심을 충족하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면?

이제 VR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케이스가 항공 분야인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인간은 날고 싶어 하지만, 죽는 건 싫어하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고양이를 살릴 수 있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로 에드윈 링크(Edwin Link)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비행 시뮬레이터이자 "가상 현실의 효시" 라고 평가받는 Link Trainer입니다.

1929년, 에드윈 링크는 조종사들이 훈련 중 실수로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일이 잦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실제 비행 없이 조종 기술을 익힐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 끝에, 그는 세계 최초의 비행 시뮬레이터, Link Trainer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장치는 악기 제작 기술에서 착안한 공기압 시스템을 이용해 조종사의 입력에 따라 실제 비행과 유사한 움직임을 구현했으며, 계기판도 실제 항공기와 동일하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Link Trainer의 가장 큰 강점은 조종사들이 위험 없이 비행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습니다. 이 덕분에 수많은 신참 조종사들이 비행 감각을 익히고, 난기류 대처나 야간 비행과 같은 실전 기술을 연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대규모로 도입하면서 필수적인 훈련 장비로 자리 잡았으며, 미국에서만 50만 명 이상의 조종사가 Link Trainer를 통해 훈련을 받았습니다. Link Trainer는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 캐나다, 독일, 뉴질랜드, 영국, 이스라엘, 일본, 파키스탄, 소련 등으로 뻗어나간 전세계적인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무려 10,000대 이상이 판매되었고 이는 45분에 한 대씩 팔려나간 셈이니, 비행 훈련에서 안전과 효율성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겠습니다.

이제 우주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NASA와 VR, 필연적 만남

당시 비행이 인간에게 극한 환경이었다면, 오늘날 우주 탐사는 그보다 더욱 가혹한 도전입니다. 앞서 거듭 언급했듯이, 극단적인 환경과 가상 현실은 매우 잘 어울리는 커플입니다. 매우 당연하게도, NASA가 VR 기술을 가만히 놔뒀을리는 없죠.

1. 시대를 너무 앞서가지 '않은' NASA의 hmd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평가받는 닌텐도의 '버추얼 보이' 를 아시나요? 버추얼 보이는 VR 게임기의 조상이자 닌텐도 최대의 흑역사로 평가받는 휴대용(이라 말하고 거치용이라고 읽는) 게임기입니다. 1995년에 출시되었고, 출시된지 1년도 안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야심작이었죠. 1989년 출시된 '파워 글러브' 는 또 어떻습니까? 당시로서는 혁명이나 다름없었던 모션 인식 기술을 적용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모션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 빼고는(?)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버추얼 보이와 파워 글러브 이전에, NASA가 무려 1985년에(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개발한 VIEW(Virtual Environment Workspace)가 있었습니다.

VIEW 는 HMD의 ‘조상’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기기입니다. 보시다시피 단순한 시각적 환경만 제공할 수 있었지만, VIEW HMD는 최초로 데이터글러브(dataglove)를 적용한 VR 시스템이었습니다. 사용자는 이 장갑을 착용함으로써 가상 공간에서 물체를 집을 수 있었고, 손짓으로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데이터글러브에는 촉각 피드백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습니다. 즉, 가상 환경에서 물체를 만졌을 때 실제로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햅틱 피드백 기술과 유사한 개념이 이미 1985년에 구현된 것인 셈이니 정말 놀랍네요!

VIEW도 사실은 프로토타입에서 그치고 시대를 앞서갔다고 평가받을 뻔 했으나… 1990년 허블 망원경 수리 미션과 함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2. 허블 망원경을 고쳐라!

1990년 허블 우주 망원경이 발사된 직후, 주요 거울에 결함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초기 촬영된 이미지의 선명도가 크게 저하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NASA에서 허블 망원경 수리 미션을 위해 VR 팀이 꾸려졌지만, 애당초 VR은 첫번째 옵션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수중 환경 훈련 시설이 이미 장비, 모형, 우주복을 사용하여 이러한 훈련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특히 당시 VR 하드웨어는 고해상도 그래픽이나 정밀한 모션 인식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훈련에 굳이 VR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훈련에 걸쳐 수중 환경 훈련의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대형 구조물을 재현하는 데 물리적 한계가 있었던 거죠. 당시 허블 우주 망원경의 전체 구성은 너무 컸습니다. 따라서 훈련을 위해 망원경 모형을 분할하는 것이 불가피했고, 이는 훈련 환경과 실제 환경의 유사도를 낮추어 결국 VR 팀에게 기회의 창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VR 훈련은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서 망원경의 전체 구조를 재현하고, 우주선-로봇 팔-망원경이 함께하는 전체 작업 공간을 시각적으로 몰입감 있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리하여 VR의 도입은 허블 수리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으며 다른 훈련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계기가 됩니다.

💡 DOUG란?

허블 우주망원경 수리 미션과 함께 고해상도 그래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DOUG(Dynamic On-board Ubiquitous Graphics)는 NASA 존슨 우주 센터의 가상 현실 연구소(VRL)에서 개발하고 사용하는 3D 그래픽 소프트웨어 패키지입니다.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우주용 유니티', '우주용 언리얼' 으로 받아들이는 것!)

3. NASA는 VR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SAFER 훈련 시스템

EVA(Extravehicular Activity : 선외활동)은 우주비행사들에게 가장 위험한 임무 중 하나입니다. 과거 우주왕복선 미션에서는 만약 승무원이 EVA 중 선체에서 떨어지더라도, 우주왕복선 자체를 움직여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우주정거장(ISS)의 경우, 그렇게 기동하여 구조를 실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주비행사 스스로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SAFER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SAFER(Simplified Aid for EVA Rescue)는 우주비행사의 등에 매달린 작은 제트팩으로, 24개의 미세 추진기를 사용해 사용자가 직접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우주에서의 구명조끼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우주에서 제트팩을 사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NASA는 VR을 활용해 우주비행사들이 SAFER를 훈련할 수 있도록 합니다.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의 ISS 외부에서 비상 상황을 시뮬레이션합니다. 우주비행사들은 가상의 정거장에서 떨어져 나가고, SAFER를 사용해 다시 ISS로 돌아오는 훈련을 반복합니다.